일제시기 국내외 민족해방운동

  안녕하세요..^^* 일본에 대항해서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오늘은 국 내외 민족해방운동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합니다.


  1910년도에는 일제가 안악사건이나 데리우치 총독 미수사건 등을 조작하여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투옥 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을 탄압하게 되는 것이죠. 이와 더불어서 집회 결사의 자유도 없어졌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할려면 비밀리에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통 학교와 서당에서 합법적인 결사가 가능해서 거기에서 실력양성운동이 일어 난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국내에서 불가능하게 되었던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연해주에는 권업회 서간도에서는 경학사 ,부민단 그리고 북간도에서는 간민회 중광단 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즉 민족의 정치적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그리고 그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하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패전국의 식민지들은 독립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승전국이였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독립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 청년과 학생 노동자 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33인은 독립문만 낭독하고 자수해버리고 이중 몇몇은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죠. 그러나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 운동은 확대되게 됩니다.


  이 운동에 힘입이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정보의 자금을 국내에 대고 국내와 연락업무를 위해서 교통국을 설치하며 파리 강화 회의등 외교활동에 선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미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대통령에서 탄핵되게 되고 초반에는 힘을 바루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가 조선에도 물들게 됩니다.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고 정우외 선언으로 인해서 신간회가 설립되게 됩니다. 여기서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즉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독자적인 위치에서 항일 운동을 하는 자와 사회주의자가 통합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열기로 한 일이 발각되어서 수만은 투사들이 잡히게 되고 새 간부진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고 자치운동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비판대상이 되었고 결국 1931년 해소되게 됩니다.



  결국 이를 조선건국동맹이 이어받고 재만한인조국광복회 화북 조선청년 연합회 등과 같은 좌 우익을 막론한 단체들이 만들어 지게 됩니다. 중국의 국공합작을 보면서 이 단체들 역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를 따지지 않고 결집하게 되었죠. 하지만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더불어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일제가 너무 빨리 패망을 해서 결국 연합국의 군대나 정치단체로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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